키티 제노비스 사건, 38명의 방관자는 정말 있었나
1964년 키티 제노비스 사건과 '38명의 방관자' 서사를 증거·범죄심리·제도의 관점에서 다시 본다. 방관자 효과와 911 신고 시스템까지.
작성 · 검수 서동혁 · 최종 검토 2026년 8월 23일
사건 요약
- 1964년 뉴욕 큐가든에서 캐서린 '키티' 제노비스가 두 차례 공격 끝에 살해됐고, 뉴욕타임스는 '38명이 보고도 신고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 2007년 학술 재검증과 이후 자료는 그 숫자와 '냉담한 방관자' 서사가 대부분 사실과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 이 사건은 방관자 효과 연구와 미국의 통합 긴급신고(911) 논의를 앞당긴 계기로 함께 거론된다.
1964년 3월 13일 새벽, 뉴욕 퀸스의 주택가에서 28세 여성 캐서린 ‘키티’ 제노비스가 귀가 도중 살해됐다. 2주 뒤 뉴욕타임스는 38명이 범행을 지켜보고도 아무도 신고하지 않았다고 보도했고, 이 문장은 ‘방관자 효과’라는 말과 함께 반세기 넘게 인용됐다. 그러나 그 숫자와 그 서사는 시간이 지나면서 대부분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1964년 큐가든의 새벽, 무슨 일이 있었나
수사와 재판으로 정리된 골자는 이렇다. 제노비스는 두 차례에 걸친 공격 끝에 숨졌고, 그 사이 이웃 한 사람의 고함에 가해자가 한 번 물러났다가 돌아왔다.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는 뒷날의 통념과는 결이 다르다.
그날 새벽 3시가 넘은 시각, 야간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제노비스를 낯선 남성 윈스턴 모즐리가 뒤따랐다. 첫 공격이 시작되자 건물의 한 주민 로버트 모저가 창밖으로 “그 여자를 내버려 두라”고 외쳤고, 모즐리는 그 소리에 일단 자리를 떴다. 문제는 그가 약 10분 뒤 다시 돌아왔다는 것이다. 제노비스는 자신이 사는 건물 현관 안쪽으로 몸을 피했지만 그곳에서 두 번째 공격을 받았다.
이웃 소피아 파라는 비명을 듣고 밖으로 나와 쓰러진 제노비스를 끌어안았고, 제노비스는 곧 숨을 거뒀다. 가해자 모즐리는 며칠 뒤 다른 사건으로 붙잡혔고 이 살인을 자백했다.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뒤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경찰 발표와 이후 보도를 종합하면 2016년 수감 중 81세로 사망했다.

’38명이 지켜봤다’는 이야기는 사실이었나
확인된 기록은 38명이 ‘살인을 지켜봤다’고 말하지 않는다. 경찰이 사건 뒤 진술을 받은 사람이 대략 38명이었을 뿐이고, 그들 다수는 짧고 불분명한 비명을 들었다고 했지 범행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봤다고 하지 않았다.
1964년 3월 27일자 뉴욕타임스 기사(마틴 갠스버그 기자)의 제목은 “살인을 본 37명이 경찰에 전화하지 않았다”였다. 편집을 이끈 인물은 편집국의 A. M. 로젠탈이었다. 이 기사는 강렬했지만 여러 대목에서 사실과 어긋났다. 공격은 세 차례가 아니라 두 차례였고, 새벽 시간과 창의 각도 탓에 실제로 ‘장면을 목격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앞서 본 대로 모저는 소리를 질러 가해자를 한 번 쫓았고, 파라는 직접 내려와 피해자를 안았다. 경찰에 연락이 닿은 정황도 있었다.
2007년 학술지 아메리칸 사이콜로지스트에 실린 매닝·러바인·콜린스의 연구는 이 지점을 정면으로 짚었다. 연구진은 당시 자료를 검토한 결과 ’38명의 목격자가 가만히 지켜봤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가 없다고 결론지었다. 기록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잔혹한 단독 범행이 있었고 대응이 느리고 조각나 있었다’는 사실까지다. 기록이 말하지 못하는 것은 ‘수십 명이 무심하게 구경했다’는 서사다. 확인된 사실과 그 위에 얹힌 해석을 구분하지 않으면, 이 사건은 실제와 다른 이야기로 남는다.
| 쟁점 | 보도로 굳어진 서사 | 이후 확인된 사실 |
|---|---|---|
| 목격자 수 | 38명이 범행을 지켜봄 | 경찰이 진술 받은 인원이 약 38명, 대부분 비명만 들음 |
| 공격 횟수 | 세 차례 | 두 차례 |
| 주민 반응 | 전원 방관 | 고함으로 가해자를 쫓은 이웃, 피해자를 안은 이웃 존재 |
| 신고 여부 | 아무도 신고 안 함 | 경찰에 연락이 닿은 정황 존재 |

사람은 왜 위급한 순간에 나서지 못하나
심리학은 목격자가 많을수록 오히려 개입이 줄어든다는 ‘책임 분산’을 지목한다. 나서야 할 책임을 그 자리에 있는 사람 수만큼 나눠 갖는다고 느끼기 때문에, 각자가 짊어지는 몫이 작아진다는 것이다.
심리학자 존 달리와 빕 라타네는 이 사건을 계기로 1960년대 후반 일련의 실험을 설계했다. 이들은 응급 상황을 목격한 사람이 혼자일 때보다 여럿일 때 개입 확률이 뚜렷이 낮아진다는 것을 반복해서 확인했다. 여기에는 책임 분산 외에 ‘다원적 무지’도 작동한다. 남들이 가만히 있는 것을 보고 ‘별일 아닌가 보다’라고 서로가 서로를 오독하는 것이다. 이 두 기제는 이후 수많은 후속 실험으로 뒷받침됐다.
역설은 여기에 있다. 방관자 효과라는 현상 자체는 실재하지만, 그 현상을 세상에 알린 상징적 사례였던 제노비스 사건은 정작 그 현상의 정확한 표본이 아니었다. 나는 미국에서 형사사법을 공부하며 이 사건을 ‘방관의 대표 사례’로 배웠다. 뒤늦게 원자료를 들여다보고서야, 교과서가 사건을 단순화해 담을 때 무엇이 잘려 나가는지를 실감했다. 현상이 참이라는 것과, 특정 사건이 그 현상의 증거라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이 죽음은 911 신고 시스템과 어떻게 얽혔나
당시 미국에는 전국 공통 긴급번호가 없었다. 경찰을 부르려면 지역 경찰서 번호를 따로 알아야 했고, 이 공백은 신고를 머뭇거리게 만든 구조적 배경으로 지목됐다. ‘누구에게, 어디로 걸어야 하는가’가 분명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개인의 선의만으로 신고가 빨라지지 않는다.
미국이 긴급번호 911을 지정한 것은 1968년으로, 그해 2월 앨라배마주 헤일리빌에서 첫 911 통화가 이뤄졌다. 통합 긴급번호 도입은 연방통신위원회와 통신사의 오랜 논의 끝에 나온 결과이므로, 제노비스 사건 하나가 그것을 만들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신고 경로가 비어 있으면 목격이 곧 구조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을 사회에 각인시킨 사건으로 자주 함께 거론된다. 제도의 관점에서 이 사건의 값어치는 여기에 있다.
한국의 112·119처럼 번호 하나로 통하는 체계가 당연해 보이지만, 그 당연함은 이런 실패의 반복 위에 세워진 것이다. 제도가 비어 있던 자리를 확인하는 일은, 개인을 탓하는 것보다 다음 사건을 줄이는 데 가깝다. 신고가 늦어지는 사건에서 사람의 무관심만 보면, 정작 손봐야 할 시스템은 시야에서 사라진다. 국내에서도 반복된 신고가 제때 조치로 이어지지 못한 사례는 진주 방화 안인득 사건처럼 낯설지 않다.
내가 보는 이 사건
여기서부터는 확인된 사실이 아니라 내 판단이다. 나는 이 사건에서 진짜로 오래 남는 문제는 가해자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기사 서사가 어떻게 ‘사실’로 굳어져 반세기 동안 심리학 교실과 대중의 냉소를 지배했는가라고 본다. 근거는 앞에서 정리한 대로다. 목격자 수, 공격 횟수, 주민 반응, 신고 여부 네 가지가 모두 원래 보도와 어긋났는데도, ‘도시의 냉담’이라는 강렬한 요약만 살아남았다.
반대로, ‘방관자 효과는 허구다’ 또는 ‘아무도 책임이 없었다’는 쪽으로 몰아가는 해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게 보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 진술을 남긴 사람 중 일부가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가능성은 남아 있고, 여럿이 있을수록 개입이 줄어드는 경향은 이 사건과 무관하게 실험으로 확인된 실체다. 신화를 걷어내는 일과 현상을 부정하는 일은 다르다.
내 한계도 밝혀 둔다. 나는 수사기관에 몸담아 본 적이 없고, 60년 전 미국의 사건을 2차 자료와 번역된 기록으로 읽는 위치에 있다. 그래서 ‘무엇이 확실히 거짓인가’보다 ‘무엇이 확실히 참이라고 말할 수 없는가’에 무게를 둔다. 그래도 판단은 해 둔다. 이 사건의 교훈은 인간이 냉담하다는 것이 아니라, 서사가 증거를 앞지를 때 얼마나 오래 살아남는가에 있다.
그래서 우리가 봐야 할 것
실질적인 교훈은 ‘사람을 믿지 말라’가 아니라 ‘책임을 구체적으로 지목하라’다. 방관자 효과가 알려주는 것은 위급한 상황에서 ‘누군가 하겠지’가 가장 위험한 심리라는 점이다. 이 심리는 대상을 특정하는 순간 깨진다.
거리에서 응급 상황을 만났을 때 ‘아무나 신고 좀 해 주세요’는 잘 작동하지 않는다. “거기 파란 옷 입으신 분, 112에 전화해 주세요”처럼 한 사람을 지목하면 책임이 분산되지 않는다. 심폐소생술 교육에서 신고자를 손가락으로 지정하라고 가르치는 것도 같은 원리다. 제도의 몫도 분명하다. 신고 경로를 단순하게 유지하고, 신고자가 불이익을 걱정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장치가 있어야 목격이 구조로 이어진다. 스토킹·협박처럼 신고가 조치로 연결되지 못해 벌어진 사건은 신당역 살인사건에서도 되풀이됐다.
위급 상황에서 도움을 청할 때는 ‘누군가’가 아니라 ‘특정한 한 사람’을 지목해 역할을 맡기는 것이 신고 지연을 줄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키티 제노비스 사건이 지금도 읽히는 이유는, 이 이야기가 두 가지를 동시에 가르치기 때문이다. 하나는 사람이 어떻게 서로에게 기대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게 되는가이고, 다른 하나는 그럴듯한 서사가 어떻게 사실을 덮는가이다. 사건을 시간순으로 아는 것으로는 이 둘 다에 닿지 못한다.
자주 묻는 질문
- Q. 정말 38명이 살인을 지켜보고도 방관했나? — 그렇게 보기 어렵다. 38은 경찰이 사건 뒤 진술을 받은 대략의 인원이며, 다수는 짧은 비명만 들었을 뿐 범행을 처음부터 지켜본 것이 아니다. 2007년 학술 재검증도 ’38명이 지켜봤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가 없다고 봤다.
- Q. 그럼 방관자 효과 자체가 틀린 이론인가? — 아니다. 목격자가 많을수록 개입이 줄어드는 경향은 달리와 라타네의 실험을 비롯해 여러 연구로 반복 확인됐다. 다만 이 현상을 알린 상징적 사례였던 제노비스 사건 자체는 그 현상의 정확한 표본은 아니었다.
- Q. 이 사건이 911 긴급번호를 만든 계기인가? — 911 도입은 연방통신위원회와 통신사의 오랜 논의 끝에 1968년 이뤄진 것이라 이 사건 하나가 만들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통합 신고 체계의 필요성을 사회에 각인시킨 사건으로 함께 거론된다.
- Q. 가해자는 어떻게 됐나? — 윈스턴 모즐리는 며칠 뒤 다른 사건으로 붙잡혀 이 살인을 자백했다.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이후 보도를 종합하면 2016년 수감 중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