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국민은행 강도살인, 완전범죄는 왜 21년 만에 무너졌나
2001년 대전 국민은행 지하주차장에서 3억 원과 함께 사라진 2인조 강도가 21년 만에 붙잡혔다. DNA와 태완이법, 강도살인 양형까지 미제가 풀린 과정을 짚었다.
작성 · 검수 서동혁 · 최종 검토 2026년 9월 23일
사건 요약
- 2001년 대전 국민은행 지하주차장에서 3억 원을 강탈하고 은행 직원을 살해한 2인조가 21년 만에 검거됐다.
- 현장 손수건의 DNA와 불법 게임장 담배꽁초의 DNA가 일치하면서 미제가 풀렸다.
- 2015년 태완이법(살인죄 공소시효 폐지)이 없었다면 2016년 시효 만료로 처벌이 불가능했다.
2001년 12월 21일 오전, 대전 서구 둔산동 국민은행 지하주차장에서 총성이 울렸다. 현금 3억 원이 사라졌고, 돈가방을 옮기던 은행 직원 한 사람이 그 자리에서 숨졌다. 두 범인의 이름이 밝혀지기까지 21년이 걸렸다.
대전 국민은행 강도살인 사건은 어떻게 일어났나
대전 국민은행 강도살인 사건은 2001년 12월 21일 오전, 대전 서구 둔산동 국민은행 지하주차장에서 현금수송 차량이 도착하는 순간 벌어졌다. 경찰 발표와 당시 보도에 따르면, 3억여 원이 든 돈가방 두 개를 옮기던 차량에는 현금 출납 담당자와 청원경찰, 운전기사 세 사람이 타고 있었다. 복면을 쓴 두 사람이 도난 차량으로 수송차를 가로막고 내렸고, 그중 한 명이 권총을 들고 있었다.
짧은 순간에 여러 발의 총성이 울렸다. 현금 출납을 맡고 있던 김 모(45) 씨가 총에 맞아 숨졌다. 범인들은 3억 원을 챙겨 달아났고, 타고 온 차량은 앞서 도난 신고된 것이었다. 무기를 준비하고 남의 차량을 이용해 얼굴을 가린 정황으로 볼 때, 이들은 처음부터 흔적을 남기지 않는 ‘완전범죄’를 설계한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초동수사는 곧 벽에 부딪혔다. 도주 차량은 버려졌고, 복면 탓에 인상착의는 특정되지 않았으며, 사건을 사람과 이어 줄 결정적 진술도 나오지 않았다. 수사본부는 오래 유지됐지만 범인은 잡히지 않았고, 사건은 그렇게 장기미제로 남았다. 아래는 사건 발생부터 대법원 확정까지의 흐름이다.
| 시점 | 내용 |
|---|---|
| 2001.12 | 대전 둔산동 국민은행 주차장 강도살인 — 3억 원 강탈, 은행 직원 1명 사망 |
| 2011 | 경찰 재수사 착수 |
| 2015.7 | 이른바 ‘태완이법’ 시행 — 살인죄 공소시효 폐지 |
| 2017 | 현장 유류품(손수건)에서 범인 DNA 확보 |
| 2022.8 | 이정학·이승만 검거 (사건 발생 21년 만) |
| 2023.12 | 대법원, 두 사람 무기징역 확정 |

왜 이 사건은 21년 동안 미궁에 빠져 있었나
물증은 있었지만, 그 물증을 특정한 사람과 이어 줄 수단이 2001년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사건 현장에는 범인들이 남긴 유류품이 있었고 거기서 유전자도 검출됐다. 문제는 그 유전자가 ‘누구’의 것인지 말해 줄 대조 대상이 없었다는 데 있다. DNA는 두 사람이 한 짓임을 증명할 수는 있어도, 이름과 얼굴까지 알려 주지는 못한다.
당시 수사 환경도 지금과 달랐다. 지하주차장의 폐쇄회로(CCTV)는 화질과 각도의 한계가 뚜렷했고, 차량은 도난품이라 소유 관계로 범인을 좁힐 수 없었으며, 복면은 인상착의 수사를 원천에서 막았다. 유전자 감식 기술과 데이터베이스가 초기 단계였던 시점에, 대조군 없는 DNA는 금고 안에 든 열쇠와 같았다. 증거는 분명히 말하고 있었지만, 그 말을 알아들을 사전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던 셈이다.
계획범죄의 특성도 미제를 길게 만들었다. 우발적 범행은 흥분과 실수의 흔적을 남기지만, 준비된 범행은 남길 것과 지울 것을 미리 계산한다. 무기·도난 차량·복면·도주 경로까지 설계된 이 사건에서 수사가 붙잡을 만한 ‘연결 고리’는 애초에 얇았다. 그 얇은 고리 하나가 21년 뒤에야 손에 잡혔다.

미제를 다시 연 것은 무엇이었나 — 손수건과 담배꽁초
현장에 남은 DNA와, 21년 뒤 전혀 다른 장소에서 나온 담배꽁초의 DNA가 일치하면서였다. 경찰은 2011년 재수사에 들어갔고, 언론 보도에 따르면 2017년 무렵 현장 유류품인 손수건에서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전자를 확보해 두고 있었다. 오래된 시료를 다시 분석할 수 있게 한 것은 그사이 발전한 감식 기술이었다.
결정적 전환은 엉뚱한 곳에서 왔다. 한 불법 게임장에서 채취된 담배꽁초의 DNA가 은행 강도살인 현장의 DNA와 일치한 것이다. 경찰은 그 게임장에 드나들었을 가능성이 있는 1만5천여 명을 훑은 끝에 2022년 이정학을 용의자로 특정했고, 같은 해 8월 그를 검거했다. 이정학의 진술을 토대로 공범 이승만도 같은 날 붙잡혔다. 검거 과정에서 이정학은 실제 방아쇠를 당긴 사람으로 이승만을 지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목은 ‘과학수사’라는 말이 흔히 지우는 진실을 보여 준다. DNA는 두 시료가 같은 사람의 것임을 알려 줄 뿐, 그 사람이 누구이고 어디에 있는지는 여전히 발로 찾아야 한다. 미국이 운영하는 통합 DNA 데이터베이스(CODIS)처럼 채취된 유전자가 자동으로 대조되는 체계가 있어도, 그 안에 등록돼 있지 않은 사람은 걸리지 않는다. 나는 미국에서 형사사법을 공부하며 이런 장기미제 재수사 사례를 여러 건 들여다봤는데, 데이터베이스의 성패는 언제나 ‘누구의 유전자가 그 안에 들어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이 사건 역시 게임장 단속이라는 우연한 접점과 1만5천 명을 좁힌 발품이 없었다면 손수건의 DNA는 계속 침묵했을 것이다. 40년 미제를 먼 친척의 유전자로 되짚은 골든스테이트 킬러 사건과 견주면, 국내 사건은 계보(系譜) 대신 데이터베이스와 탐문에 기댔다는 점에서 결이 다르다.
DNA가 남아 있어도 대조할 데이터베이스와 그 안의 등록 자료가 없으면 신원은 밝혀지지 않는다. 장기미제 해결은 기술만이 아니라 ‘증거 보존’과 ‘데이터 축적’이라는 제도가 함께 갖춰질 때 가능해진다.
태완이법이 없었다면 처벌할 수 있었을까
없었다면 이 사건은 2016년 공소시효 완성으로 영원히 처벌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건 당시 법으로는 강도살인에도 공소시효가 적용됐고, 언론 보도로는 이 사건의 시효가 2016년 만료될 예정이었다. 그대로였다면 2017년의 DNA 확보도, 2022년의 검거도 법적으로는 ‘이미 늦은’ 일이 될 뻔했다.
흐름을 바꾼 것은 2015년 7월 시행된 형사소송법 개정, 이른바 ‘태완이법’이다. 이 개정은 사형에 해당하는 살인죄의 공소시효를 폐지했고, 시행 시점에 아직 시효가 완성되지 않은 사건에도 적용됐다. 강도살인은 법정형에 사형이 포함되는 범죄여서 이 조항의 대상이 됐고, 2016년 만료를 앞두고 있던 대전 사건은 아슬아슬하게 시효의 벽을 넘어섰다. 제도가 몇 달 차이로 사건을 구제한 셈이다.
공소시효는 시간이 지나면 증거가 흩어지고 처벌의 실익이 줄어든다는 판단 위에 서 있는 제도다. 그러나 사람의 목숨을 앗은 범죄에서 ‘시간이 지났다’는 이유만으로 국가가 손을 떼는 것이 정의로운가는 오래 논쟁의 대상이었다. 태완이법은 그 물음에 대한 사회의 답이었고, 대전 국민은행 사건은 그 답이 실제로 어떤 결과를 낳는지 보여 주는 사례가 됐다. 제도가 비어 있던 자리를 채웠을 때 무엇이 달라지는지를, 이 사건만큼 선명하게 보여 주는 예도 드물다.
왜 방아쇠를 당긴 사람과 아닌 사람이 같은 형을 받았나
강도살인죄에서 공동정범은 누가 총을 쐈는지와 무관하게 같은 책임을 지기 때문이다. 재판에서는 실제 발포자가 누구인지가 쟁점이 됐지만, 그 결론이 형량을 가르는 유일한 축은 아니었다. 강도를 함께 모의하고 실행한 이상, 그 과정에서 벌어진 살인의 책임은 두 사람에게 공동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법리의 뼈대다.
실제 선고는 심급마다 조금씩 달랐다. 1심인 대전지법은 이승만에게 무기징역을, 이정학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해 두 사람의 역할을 다르게 평가했다. 그러나 항소심인 대전고법은 강도살인의 법정형이 사형 또는 무기징역뿐이라는 점을 들어 이정학에게도 무기징역을 선고했고, 2023년 12월 대법원이 이를 확정했다. 방아쇠를 직접 당겼는지 여부보다, 함께 저지른 강도살인이라는 죄의 무게가 형량을 결정한 것이다.
| 심급 | 이승만 | 이정학 |
|---|---|---|
| 1심 (대전지법) | 무기징역 | 징역 20년 |
| 2심 (대전고법) | 무기징역 | 무기징역 |
| 대법원 (2023.12) | 무기징역 확정 | 무기징역 확정 |
이 양형은 강도살인 공동정범 사건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되는 원칙을 다시 보여 준다. 재판부가 ‘완전 범죄를 노린 계획적 범행’이라고 판단한 점, 21년간 피해 회복이나 진정한 반성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본 점도 무겁게 작용했다. 누가 더 앞장섰느냐를 따지는 일과, 함께 만든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묻는 일은 층위가 다르다는 것을 이 판결은 분명히 한다.
내가 보는 이 사건
여기서부터는 확인된 사실이 아니라 내 판단이다. 나는 이 사건의 진짜 교훈이 ‘DNA 과학의 승리’라는 흔한 요약에 있지 않다고 본다. 이 사건이 풀린 것은 세 가지 제도가 우연히 같은 시기에 맞물린 결과다. 첫째는 20년 가까이 시료를 버리지 않고 보존한 증거 관리, 둘째는 그 시료를 다른 유전자와 견줄 수 있게 한 데이터 축적, 셋째는 2016년 만료를 앞둔 공소시효를 폐지한 태완이법이다. 이 중 하나라도 어긋났다면 두 사람의 이름은 끝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사건을 ‘기술이 범죄를 이겼다’고 읽는 시각에는 절반만 동의한다. 현장 DNA는 2017년에 이미 확보돼 있었지만, 그것이 사람으로 이어진 것은 불법 게임장 단속이라는 우연한 접점과 1만5천 명을 좁혀 간 탐문 덕분이었다. 기술은 문을 열 열쇠를 만들어 줬을 뿐, 그 열쇠를 맞는 자물쇠에 꽂은 것은 결국 사람의 발이었다고 본다. 완전범죄가 무너진 지점을 과학 한 곳에만 돌리면, 정작 중요한 ‘제도와 인력’이라는 조건을 놓치게 된다.
다만 나는 수사기관에 몸담아 본 적이 없고, 판결문과 보도로 사건을 읽는 사람이다. 방아쇠를 당긴 사람이 누구였는지,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지배와 종속이 있었는지 같은 내밀한 부분까지 단정할 위치에 있지 않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사건이 ‘시간이 흐르면 잊힌다’는 범죄자의 계산을 제도가 어떻게 뒤집었는가에 대한 드문 기록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무엇을 봐야 하나
이 사건이 남긴 첫 번째 신호는 ‘증거 보존’의 가치다. 2001년의 손수건이 21년 뒤에도 감식 가능한 상태로 남아 있었기에 재수사가 성립했다. 장기미제 전담 수사 체계와 증거물 보존 원칙은 눈에 띄지 않지만, 결정적 순간에만 그 존재가 드러나는 종류의 투자다. 지금 풀리지 않은 사건들 역시 ‘언젠가’를 위해 무엇을 보관하고 있느냐에 미래가 걸려 있다.
두 번째는 데이터베이스와 재수사 제도의 연결이다. 재범자·수형자 등에서 채취되는 DNA가 축적될수록 과거의 유류물과 맞아떨어질 확률은 높아진다. 다만 그만큼 누구의 유전자를 어떤 근거로 수집·보관할 것인가라는 인권의 문제도 함께 커진다. 미제 해결의 효율과 개인정보 보호 사이에서 어디에 선을 그을지는, 이런 성공 사례가 늘어날수록 오히려 더 신중히 따져야 할 물음이다.
마지막으로, 이 사건은 ‘완전범죄란 없다’는 문장을 실증했지만 동시에 그 문장이 얼마나 많은 조건 위에서만 성립하는지도 보여 줬다. 21년이라는 시간, 우연한 접점, 폐지 직전에 붙잡은 공소시효까지 겹쳐야 했다. 아직 이름조차 나오지 않은 다른 미제들 앞에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언제 잡히나’가 아니라 ‘그때 잡을 수 있게 지금 무엇을 남겨 두고 있나’이다.
자주 묻는 질문
- Q. 대전 국민은행 강도살인 사건은 어떻게 21년 만에 해결됐나요? — 사건 현장 유류품에서 확보해 둔 범인의 DNA가, 한 불법 게임장에서 나온 담배꽁초의 DNA와 일치하면서 실마리가 풀렸다. 경찰은 그 게임장 출입자 1만5천여 명을 조사해 2022년 이정학을 특정했고, 그의 진술로 공범 이승만까지 검거했다.
- Q. 태완이법이 이 사건과 무슨 관련이 있나요? — 이 사건의 공소시효는 2016년 만료될 예정이었다. 2015년 7월 시행된 이른바 태완이법이 살인죄의 공소시효를 폐지하면서, 아직 시효가 남아 있던 이 사건도 계속 수사·기소할 수 있게 됐다. 법 개정이 없었다면 처벌이 불가능했을 사건이다.
- Q. 두 범인은 어떤 처벌을 받았나요? — 1심에서는 이승만에게 무기징역, 이정학에게 징역 20년이 선고됐으나, 항소심에서 강도살인의 법정형이 사형 또는 무기징역뿐이라는 이유로 이정학도 무기징역을 받았다. 2023년 12월 대법원이 두 사람 모두에게 무기징역을 확정했다.
- Q. 실제로 총을 쏜 사람은 누구인가요? — 검거 과정에서 이정학은 이승만을 발포자로 지목한 것으로 알려졌고, 실제 방아쇠를 당긴 사람이 누구인지가 재판의 쟁점이 됐다. 다만 강도살인 공동정범은 발포 여부와 무관하게 같은 책임을 지므로, 두 사람은 동일하게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