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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제 미스터리

소머턴 맨, 74년 만에 이름을 찾고도 왜 사인은 미제인가

1948년 소머턴 맨 사건은 2022년 DNA 족보수사로 칼 웹이라는 이름을 찾았지만, 사인과 암호는 74년이 지난 지금도 미제로 남아 있다. 증거의 한계와 미제의 조건을 짚는다.

소머턴 맨, 74년 만에 이름을 찾고도 왜 사인은 미제인가
소머턴 맨, 74년 만에 이름을 찾고도 왜 사인은 미제인가

작성 · 검수 서동혁 · 최종 검토 2026년 9월 4일

미스터리 개요

  • 1948년 애들레이드 해변에서 발견된 신원 미상 남성, 상표를 뜯은 옷과 '타만 셔드' 쪽지만 남겼다
  • 2022년 데스마스크의 머리카락에서 뽑은 DNA로 멜버른 출신 칼 웹이 지목됐으나 검시관 공식 확정은 2026년 현재도 대기 중이다
  • 이름은 밝혀졌지만 사인·미해독 암호·나이 든 간호사와의 관계라는 세 매듭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1948년 12월 1일 아침, 오스트레일리아 애들레이드의 소머턴 해변에서 한 남성이 숨진 채 발견됐다. 옷에는 상표가 뜯겨 있었고 주머니에서는 신원을 말해 줄 어떤 것도 나오지 않았다. 74년이 지난 2022년에야 그에게 이름이 붙었지만, 그가 왜 그곳에서 죽었는지는 지금도 확정되지 않았다.

소머턴 맨 사건이란 무엇인가 — 애들레이드 해변의 무명 남성

소머턴 맨은 신원과 사인을 알 수 없는 채 발견된 한 남성에게 붙은 이름이며, 20세기 오스트레일리아를 대표하는 미제로 꼽힌다. 발견 당시 그는 잘 차려입은 40대 중반가량의 남성이었고, 지갑도 신분증도 없었다. 옷에 붙어 있어야 할 상표는 뜯겨 있었다.

부검은 그를 더 어렵게 만들었다. 겉으로 건강해 보이는 몸이었는데도 사망했고, 내장의 울혈은 독극물을 의심하게 했지만 당시 독물 검사로는 어떤 물질도 검출되지 않았다. 며칠 뒤 애들레이드 기차역 수하물 보관소에서 그의 것으로 보이는 여행가방이 나왔다. 여기에서도 대부분의 상표가 제거돼 있었고, 몇몇 물건에만 ‘T. Keane’ 또는 ‘Keane’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었다.

결정적 단서는 몇 달 뒤 바지의 숨은 주머니에서 나왔다. 페르시아 시집 루바이야트의 마지막 구절인 ‘타만 셔드(Tamam Shud)’ — ‘끝났다’는 뜻 — 만 오려 낸 작은 종잇조각이었다. 1949년 7월, 그 조각과 찢긴 자리가 정확히 맞는 루바이야트 한 권이 나타났다. 근처에 세워진 잠기지 않은 차 안에 놓여 있었다고 알려졌다. 책 뒷장에는 흐릿한 연필 글자로 적힌 암호 같은 문자열과 전화번호가 있었고, 그 번호는 해변 인근에 살던 한 간호사로 이어졌다. 언론에는 오랫동안 ‘제스틴(Jestyn)’이라는 가명으로만 알려진 여성이다. 그는 전쟁 중 알던 한 남성에게 루바이야트를 준 적이 있다고 인정했으나, 정작 사망한 남성은 모른다고 진술했다고 전해진다.

시점 사건
1948.12.1 소머턴 해변에서 신원 미상 남성 사망 발견, 옷 상표 제거
1949 숨은 주머니의 ‘타만 셔드’ 쪽지, 루바이야트와 뒷장 암호·전화번호 발견
2021.5 남오스트레일리아 경찰, 유해 발굴
2022.7 DNA 족보수사로 칼 ‘찰스’ 웹 지목 발표
2026 경찰의 검시관 보고서 마무리 단계, 공식 결론 대기
소머턴 맨, 74년 만에 이름을 찾고도 왜 사인은 미제인가

증거는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말하지 못했나

증거는 그가 평범한 자연사가 아니라는 정황은 남겼지만, 무엇이 그를 죽였는지는 끝내 가리키지 못했다. 검시관은 신원 불명, 자연사 아님, 독극물에 의한 사망일 개연성, 우연한 사고는 아닐 것이라는 취지로 결론을 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어떤 독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없었다.

이 공백은 상당 부분 시대의 한계에서 왔다. 1940년대 말의 독물 분석은 빠르게 분해되거나 미량으로 작용하는 물질을 잡아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 ‘독이 검출되지 않았다’는 것은 ‘독이 없었다’와 같지 않다. 검출의 실패가 곧 무독의 증명은 아니라는 점은, 물증을 다룰 때 늘 조심해야 하는 지점이다.

상표가 제거된 옷과 가방은 또 다른 층위의 정보를 준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신원을 지우려 했다는 정황이다. 다만 그것을 본인이 했는지, 제3자가 했는지는 물증만으로는 갈리지 않는다. 뒷장의 연필 암호도 마찬가지다. 문자열이 지나치게 짧아 통계적 해독이 어렵고, 의미 있는 암호가 아니라 머리글자나 개인적 메모일 가능성도 배제되지 않는다는 견해가 오래전부터 제기돼 왔다. 증거는 존재하지만, 그 증거가 어디를 가리키는지는 해석의 문제로 남았다.

소머턴 맨, 74년 만에 이름을 찾고도 왜 사인은 미제인가

왜 74년 동안 미제로 남았나

신원을 특정할 제도적 수단이 없던 시대에 사건이 벌어졌고, 그 빈자리를 소문과 가설이 메웠기 때문이다. DNA 대조도, 전국 단위 지문·실종자 데이터베이스도 없던 때다. 전쟁이 수많은 사람의 기록을 흩뜨려 놓았고, 치아 대조로 맞출 사전 자료도 없었다. 신원을 여는 열쇠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1948년이라는 시점도 사건의 성격을 바꿔 놓았다. 냉전 초입의 긴장 속에서, 상표를 뜯은 옷과 풀리지 않는 암호와 ‘끝났다’는 쪽지는 첩보원설로 쉽게 번졌다. 유해는 오랫동안 방부 처리된 상태로 남아 현대적 분석을 미뤄 두었고, 그사이 가설이 사실의 자리를 차지했다. 실마리를 쥐고 있었을지 모를 간호사가 끝내 입을 닫았다는 정황도 사건을 봉인하는 쪽으로 작용했다.

미국에서 형사사법을 공부하면서, 나는 이런 유형의 사건이 2018년 이후 한꺼번에 다시 열리는 과정을 지켜봤다. 유전자 족보수사가 ‘골든 스테이트 킬러’를 지목한 그해부터, ‘영원히 못 풀 사건’으로 분류되던 것들이 실은 ‘기술이 오기를 기다리던 사건’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소머턴 맨도 그 대열에 있었다. 국내 미제에서도 잡고도 처벌에 이르지 못한 사례가 있는데, 그런 이야기는 DNA가 지운 ‘완전범죄’에서 따로 다룬 바 있다.

DNA 족보수사는 어떻게 이름을 찾았나 — 칼 웹이라는 남자

1949년 제작된 석고 데스마스크에 낀 머리카락에서 뽑아낸 DNA를, 유전자 족보 데이터베이스와 대조해 멜버른 출신 기기 제작공 칼 ‘찰스’ 웹을 지목했다. 애들레이드대학의 데릭 애벗과 미국의 계보 유전학자 콜린 피츠패트릭이 2022년 발표한 결과다. 두 사람은 상염색체 SNP 프로파일을 만들어 공개 데이터베이스 GEDmatch에 올렸고, 먼 사촌과의 일치를 실마리로 약 4,000명 규모의 가계도를 재구성한 끝에 웹에게 수렴했다고 밝혔다.

보도에 따르면 웹은 1905년 빅토리아주 풋스크레이에서 태어나 기기 제작공으로 일했고, 1941년 도러시 로버트슨과 결혼했다가 1947년경 아내를 떠났다. 그 뒤 아내는 애들레이드 인근으로 이주해 1951년 유기를 이유로 이혼 절차를 밟았다고 전해진다. 여행가방에 남아 있던 ‘Keane’이라는 이름은 웹의 누이 프리다의 남편, 즉 처남 토머스 킨과 연결됐다. 남오스트레일리아 경찰도 발굴한 치아와 뼈에서 핵 DNA를 확보해 이 신원을 뒷받침했다고 알려졌으며, 애벗은 ‘99.99% 확신한다’고 말했다.

이 방법의 본질은 사망자 본인을 데이터베이스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그의 친척을 찾아 거꾸로 좁혀 들어가는 것이다. 미국의 골든 스테이트 킬러 사건과 ‘DNA 도 프로젝트’가 같은 원리로 작동했다. 그래서 이 수사에는 조건이 있다. 데이터베이스에 충분한 수의 친척이 등록돼 있어야 하고, 오래된 시료에서 쓸 만한 DNA가 나와야 한다. 소머턴 맨의 경우 데스마스크라는 뜻밖의 보관 장치가 그 조건을 74년 만에 채워 준 셈이다.

스파이설은 왜 힘을 잃었나

냉전 첩보원설은 수십 년간 이 사건을 지배했지만, ‘평범한 멜버른 남성’이라는 신원이 그 전제를 상당 부분 허물었다. 첩보원설은 나름의 근거 위에 서 있었다. 1948년이라는 시점, 지워진 상표, 풀리지 않는 암호, 그리고 하필 ‘끝났다’는 뜻의 쪽지가 그것이다. 신원이 비어 있는 한, 이 조각들은 어떤 극적인 이야기로도 조립될 수 있었다.

그러나 칼 웹의 삶은 첩보의 문법보다 훨씬 일상적인 결을 갖고 있었다. 기기를 만들던 남성, 틀어진 결혼, 아내를 떠난 뒤의 종적. 이런 배경은 국가 간 첩보전보다 개인적 파국을 먼저 떠올리게 한다. 물론 신원이 밝혀졌다고 해서 첩보원설이 완전히 반증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설명의 무게중심이 옮겨간 것은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이름이 밝혀졌어도 ‘어떻게, 왜 죽었는가’는 그대로 열려 있다는 점이다. 신원과 사인은 별개의 문제다. 웹이라는 사람을 알게 된 지금도, 그가 스스로 생을 끝냈는지, 병으로 쓰러졌는지, 다른 손이 개입했는지는 물증으로 갈리지 않는다. 신원 규명은 미스터리의 절반을 닫았을 뿐, 나머지 절반의 문을 새로 연 것에 가깝다.

내 예상은 이렇다

여기서부터는 확인된 사실이 아니라 내 판단이다. 나는 이 죽음을 첩보전의 결말보다 한 개인의 결말로 읽는 쪽에 무게를 둔다. 신원을 스스로 지운 정황, 결혼을 정리하고 아내를 떠난 이력, 그리고 하필 ‘끝났다’는 구절만 오려 몸에 지녔다는 사실은, 그가 그 자리에서 스스로 마침표를 찍으려 했다는 해석과 어긋나지 않는다. 당시 검출되지 않은 독극물이라는 정황도 이 그림과 충돌하지 않는다.

타살이나 첩보 관련 죽음의 가능성을 나는 상대적으로 낮게 본다. 강도의 흔적이나 뚜렷한 몸싸움의 정황이 보도된 바 없고, 정교한 첩보 시나리오는 눈앞의 사실이 요구하지 않는 가정을 여러 겹 쌓아야 성립한다. 더 적은 가정으로 설명되는 쪽을 먼저 두는 것이 사건을 다루는 기본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못한다. 사인 자체가 공식적으로 열려 있고, 뒷장의 암호가 무엇인지도 끝내 규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히 해 둘 것은, 나는 수사기관에 몸담아 본 적이 없고 70여 년 전의 부검 기록을 직접 읽은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판결문과 사건 기록을 읽어 온 습관으로 정황을 겹쳐 볼 뿐이다. 그러니 이것은 결론이 아니라, 공개된 사실에 비추어 내가 더 그럴듯하다고 보는 쪽을 밝힌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 남았나 — 세 개의 매듭

이름은 밝혀졌지만, 사인과 암호와 그 여성과의 관계라는 세 개의 매듭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첫째는 사인이다. 남오스트레일리아 경찰의 검시관 보고서가 2026년 현재 마무리 단계에 있다고 현지 보도로 전해졌지만, 공식 결론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신원과 달리 사인은 물증이 침묵하는 영역이다.

둘째는 루바이야트 뒷장의 암호다. 오랜 세월 전문 암호가와 아마추어가 매달렸으나 해독되지 않았고, 애초에 해독 가능한 암호가 맞느냐는 회의까지 남아 있다. 셋째는 간호사와의 관계다. 전쟁 중 누군가에게 루바이야트를 건넸다는 그의 진술과, 사진을 보고 반응했다는 목격담 사이의 간극은 지금도 채워지지 않았다. 다만 관련자 상당수가 세상을 떠난 지금, 이 매듭은 증언이 아니라 남은 기록으로만 좁힐 수 있다.

이 사건이 오늘의 독자에게 남기는 것은 선정적 수수께끼가 아니다. 신원과 사인은 다른 문제이며, 하나가 풀렸다고 다른 하나가 따라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영원한 미제’라는 딱지가 실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기술’을 가리키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공식 확정이 나오는 날, 74년 전의 결론은 비로소 역사의 기록으로 정리될 것이다.

자주 묻는 질문

  • Q. 소머턴 맨은 결국 누구로 밝혀졌나? — DNA 족보수사로 1905년생 멜버른 기기 제작공 칼 ‘찰스’ 웹으로 지목됐다. 다만 2026년 현재 검시관의 공식 확정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 Q. 사인은 밝혀졌나? — 아니다. 당시 검시는 독극물을 의심했지만 검출하지 못했고, 자연사·자살·타살 어느 쪽도 확정되지 않았다. 신원 규명과 사인 규명은 별개의 문제다.
  • Q. ‘타만 셔드’는 무슨 뜻인가? — 페르시아 시집 루바이야트의 마지막 구절로 ‘끝났다’는 뜻이다. 시신의 숨은 주머니에서 그 문구만 오려 낸 종잇조각이 나왔다.
  • Q. 뒷장의 암호는 풀렸나? — 아니다. 루바이야트 뒷장의 연필 문자열은 지금까지 해독되지 않았고, 너무 짧아 의미를 확정하기 어렵다는 견해가 많다.